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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끄적끄적

부지런한 사랑 - 이슬아

by 봄꽃이랑 기쁨이랑 꽁냥꽁냥 2023. 7. 13.

스물아홉 살인 지금은 더이상 재능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된 지 오래다. 꾸준함 없는 재능이 어떻게 힘을 잃는지, 재능 없는 꾸준함이 의외로 얼마나 막강한지 알게 되어서다.

재능가 꾸준함을 동시에 갖춘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창작을 할 테지만 나는 타고나지 않은 것에 관해, 후천적인 노력에 관해 더 열심히 말하고 싶다. 재능은 선택할 수 없지만 꾸준함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10년 전의 글쓰기 수업에서도 그랬다. 잘 쓰는 애도 매번 잘 쓰지는 않았다. 잘 못 쓰는 애도 매번 잘 못 쓰지는 않았다. 다들 잘 썼다 잘 못 썼다를 반복하면서 수업에 나왔다. 꾸준히 출석하는 애는 어김없이 실력이 늘었다. 계속 쓰는데 나아지지 않는 애는 없었다.

- 24p

꾸준함은 선택할 수 있다.

내가 노력만 하면 얻을 수 있다.

능력이 뛰어나도 내가 관심없고 즐겁지 않으면 소용없다.

좋아하는 걸 노력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과연, 재능없는데 좋아하면 계속 해도 되는 걸까...

정말 계속 하면 나아질까...


모두 다른 컨디션과 다른 사연을 가지고 모인다. 그들과 가장 먼저 하는 건 근황 토크다. 지난 한 주간 어땠는지, 전하고 싶은 소식이 있는지 내가 묻는다. 성의 없이 물으면 성의 없는 대답이 돌아오기 때문에 우선 내 근황을 솔직하게 전해야 한다. 굿 뉴스로는 2년 만에 드디어 치아교정기를 뺀 사실을, 배드 뉴스로는 어떤 잡지에 연재를 하다가 잘렸다는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럼 아이들도 자신의 최근 소식 중 몇 가지를 엄선한다. 날마다 다른 변수와 디테일이 추가되므로 말할 거리는 언제나 생겨난다. 글쓰기를 싫어하는 아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 76p

나도 아이들과 글쓰기 준비를 해볼까 한다. 뭐했어? 라고 물으면 몰라요 라는 성의 없는 대답이 돌아올테니 성의 있게 나의 얘기부터 꺼내봐야지. 성의 있는 대화가 중요하군!


가장 어려운 우정은 자기 자신과의 우정일지도 모른다. 몸의 감각에 대한 글쓰기는 자신과 사이좋게 지내기 위한 노력 중 하나다. 다니엘 페나크는 그 일기가 상상력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몸의 온갖 신호로부터 상상력을 보호한다고 말한다.

자고 일어나면 몸도 마음도 달라져 있어서 당황스러운 10대들과 함께 몸의 일기를 쓴다. 때때로 몸의 일기가 마음의 일기보다 더 확실하고 부드럽게 몸과 마음을 연동시키기 때문이다.

- 82p


감동적인 동물 영상들이 범람하는 한편에는 공장식 축산과 공장식 수산 현장이 있다. 그라인더에 갈리는 병아리와 살처분 당하는 돼지의 얼굴들도 있다. 그 현장 역시 마음만 먹으면 유튜브에서 시청 가능하다. 나는 이쪽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믿고 싶지 않지만 슬픔의 실체는 거기에 죄다 있다고 생각한다. 비교적 조회수가 높지는 않다. 우리의 일상을 흔드는 슬픔이기 때문이다. "망각을 위한 카타르시스의 기능"이 거기엔 없다. 그 슬픔은 너무도 불편하여 우리를 어제와 똑같은 존재로 남겨두지 않는다. 비건이 아닌 이들에게도 분명히 어떤 영향을 미치고 마는 이미지들이다.

동물을 가장 많이 귀여워하는 시대이자 동물을 가장 많이 먹는 시대를 살고 있다. 외면하는 능력은 자동으로 길러지는 반면, 직면하는 능력은 애를 써서 훈련해야 얻어지기도 한다. 무엇을 보지 않을 것인가. 무엇을 볼 것인가. 스스로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며 수업에서 나온다.

- 143p


나는 집에 오는 길에도 일기장을 양손에 펼쳐들고 보면서 걸었다. 어른의 글씨로 적힌 그 문장들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누가 내 일기를 그렇게 열심히 봐준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음성이 아닌 텍스트로 말을 걸어준 선생님도 처음이었다.

내 맘속에 커다란 사명감이 솟아올랐다. 오늘도 일기를 쓰기 때문이다. 뭘 쓸 것인가! 오늘 겪은 일 중 중요한 건 무엇인가! 선생님께 무슨 이야기를 보여드려야 하나! 최초로 그런 고민이 생겼다. 골똘히 생각하며 우리 아파트 단지를 향해 걸었다. 핸드폰도 없고 메모하는 습관도 없던 시절이라 중요한 생각이 떠오르면 머깃속에 고이고이 잘 보관해야 했다.

- 194p

'어느 하루가 다르다면, 그것은 왜일까'

일기란 그것에서 출발하는 글쓰기였다. 똑같은 하루란 없었다. 똑같은 일과를 반복한대도 언제나 다른 디테일이 생겨나는 게 인생이었다. 열 살의 나는 그 변주에 기대어 일기를 썼다. 첫 문장은 주로 이런 식이었다.

"어제 수선집에 핸드폰을 두고 왔던 엄마가 오늘은 정육점에 지갑을 두고 왔다."

"오늘도 어김없이 동생과 싸웠다. 지난주엔 이겼지만 이번엔 졌다. 동생의 팔힘이 세졌기 때문이다."

...

지금까지의 내 인생+ 오늘 업데이트된 정보 + 그것에 대한 나의 마음. 이게 당시 내 일기의 구성이었다.

삼삼오오 모여 급식을 먹는 점심시간에 어디선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은선생님의 웃음소리였다. 그의 손에는 내 일기장이 들려 있었다. 심장이 쿵쾅댔다. 부끄럽고 떨리고 흥분되어서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은선생님은 다 웃고 나서 예의 그 정성스러운 코멘트를 남겨주었다.

- 195p

새로운 선생님은 나를 궁금해하지 않는구나. 그해에는 진심을 쓰려다 관둔 듯한 일기를 썼다. 일기 숙제는 계속했지만, 펄떡펄떡한 속내 같은 건 안 꺼내게 된 것이다. 나를 궁금해하는 사람에게 겨우 용기를 내서 해볼 수 있는 이야기들은 일기장에 더이상 등장하지 않았다. 중요한 이야기들은 엄마와의 대화에서, 혹은 버디버디에서, 혹은 내 마음속에서 어느새 휘발되어버리곤 했다. 문득 그게 슬퍼지는 날도 있었다. 말로 하기엔 아까운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았다.

- 197 ~ 198p

너무나 다정하게 일기 검사를 해주던 은선생님을 만난 날로부터 20년 가까이 흘렀다. 나는 글을 검사하다가 자주 균형을 잃는, 집에 돌아오며 자주 후회하는 글쓰기 교사가 되었다. 실수 없이 하는 건 궁금해하는 일 뿐이다. 네 인생의 어느 하루가 다르다면 그것은 왜냐고 물어보는 일뿐이다. 보여줄 수 있는 일기를 쓴 날들이 쌓이면 언젠가는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일기를 쓰게 될 테니까. 보여줄 수 없는 일기를 쓴 날들이 쌓이고 또 쌓이면 다시 모두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글을 완성하게 될 테니까.

- 201~202p

일기.

공감의 중요성.

관심은 아이를 글쓰게 한다.

나를 궁금해하는 사람들.

기록. 말로는 할 수 없는 아까운 이야기. 휘발되버리기엔 아까운 이야기들.을 정리해둔다.

'궁금해하기'


나는 치유를 위해 글을 쓰지 않지만 글쓰기에는 분명 치유의 힘이 있다. 스스로를 멀리서 보는 연습이기 때문이다.

그 연습을 계속한 사람들은 자신을 지나치게 불쌍히 여기거나 지나치게 어여삐 여기지 않는 채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자기 연민의 늪과 자기애의 늪 중 어느 곳에도 빠지지 않고 이야기를 완성하여 독자와 관객에게 슬픔과 재미를 준다. 혹은 두 가지를 동시에 준다. 자신 말고 타인이 울고 웃을 자리를 남긴다. 그것은 사람들을 이야기로 초대하는 예술이다. 더 잘 초대하기 위해, 더 잘 연결되기 위해 작가들은 자기 이야기를 여러 번 다르게 말해보고 써본다. 먼저 울거나 웃지 않을 수 있게 될 때까지.

- 210p


"얘들아, 하고 싶은 이야기를 평소에는 말로 하잖아. 근데 여기서는 말 말고 글로 써보자."

애들이 굳이 왜 그렇게 해야 하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말로 하면 다 날아가버리기 때문이라고 나는 대답한다.

"재밌고 중요한 이야기를 문장으로 적어서 보관하는 거야. 나중에 다 까먹으면 아깝잖아."

- 24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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