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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끄적끄적

가녀장의 시대 - 이슬아

by 봄꽃이랑 기쁨이랑 꽁냥꽁냥 2023. 6. 19.

이 책을 열자마자 감탄부터 했다.
문체가 너무나도 담백했다.
담백하고 깔끔한데도 이야기의 진행에 있어 이해하는데 아무 문제도 없었다.
일단 문체가 너무 맘에 들었고
내용은 너무나도 감동이었다.

어려운 가정을 일으켜 세우고,
가장의 역할을 하는 여성.
내가 겪는다면 쉽지 않았을 힘든 인생사를
자연스럽게 흘러가듯이 나열하는 내용이
문체와도 너무나도 잘 어우러졌다.
이슬아작가에게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은 책 한 권이 가부장제의 대안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저 무수한 저항 중 하나의 사례가 되면 좋겠습니다.
작가의 말을 일부분이다.
하나의 사례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거부감 없이 부담감 없이
술술 읽으면서 서서히 스며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가부장제 속에서 며느리의 살림노동은 결코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슬아는 복희의 살림노동에 월급을 산정한 최초의 가장이다. 살림을 직접 해본 가장만이 그렇게 돈을 쓴다. 살림만으로 어떻게 하루가 다 가버리는지, 그 시간을 아껴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기 때문에 그는 정식으로 복희를 고용할 수 밖에 없었다. 복희는 음식을 만드는 데만은 천재다. 슬아는 복희의 재능을 사서 누린다. 복희는 가장 잘하는 일로 돈을 번다.
- 40p

슬아는 개미처럼 글을 쓰면서도 된장은 담글 줄 모른다. 복희는 글을 쓸 줄은 알지만 그걸 하느니 차라리 된장을 담그겠다고 말할 것이다. 복희의 엄마 존자는 된장 담그기에 도가 텄지만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 각자 다른 것에 취약한 이들이 서로에게 의지한 채로 살아간다.
- 98p

"뭐 쓸지 생각 안 나면 어떡해요?"
슬아가 밥을 먼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대답한다.
"대체로 그래......"
할말이 없어진 철이가 심심한 위로를 건넨다.
"괴롭겠다...... 대박......"
슬아는 허공을 보며 중얼거린다.
"무슨 일을 해도 괴로운 건 마찬가진데......"
그러다가 철이를 돌아본다. 철이의 빡빡머리와 완벽한 두상을 응시하며 슬아가 말한다.
"잘하고 싶은 일로 괴로우면 그나마 낫잖아."
- 123p

그들의 안중에 슬아 따위는 없다. 슬아는 좋은 대상이 아니고 싫은 대상도 아니며 그저 관심 없는 대상일 뿐이다. 슬아가 무슨 글을 쓰든 알 바 아니며 애초에 슬아의 언어 자체가 무용하다. 그들에게 외면받고 남겨진 자리에서 슬아는 한 가지 중대한 진실을 상기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신문에 실리고 텔레비전에 나오고 책이 여러 권 팔린대도 말이다. 무신경한 인터뷰어도 배배 꼬인 악플러도 찬사를 보내는 독자들도 사실 진짜로는 관심이 없을 것이다. 숙희와 남희가 그렇듯 자신 앞의 생을 사느라 분주할 테니까. 그것을 기억해낸 슬아의 마음엔 산들바람이 분다. 관심받고 있다는 착각, 주인공이라는 오해를 툴툴 털어내자 기분좋은 자유가 드나든다.
-179p

"선생님은 먼저 선先에 날 생生이 합쳐진 말이잖아요. 먼저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제가 좋아하는 작가가 이런 말을 했어요. '내가 살아보지 못한 어떤 삶을 먼저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선생님이 될 수 있다고요."
-263p

슬아는 집으로 돌아가버린 어린 제자에게 이렇게 대답하고 싶어진다. 월화수목금토일이 반복되는 이유는 월요일부터 다시 잘해보기 위해서라고. 다시 잘해볼 기회를 주려고 월요일이 어김없이 돌아오는 거라고. 그러느라 복희는 창틀을 닦고, 웅이는 바닥을 밀고, 슬아는 썼던 글을 고치고 또 새 글을 쓴다고.

월요일은 또 돌아올 것이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세계의 아름다움 역시 달라질 것이다.
- 30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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