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 끄적끄적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 - 이슬아

by 봄꽃이랑 기쁨이랑 꽁냥꽁냥 2023. 7. 15.



가운을 벗고 무대에 오르면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몇 시간 동안 내 알몸을 그렸다. 연필이 종이에 닿는 소리를 들으며 시선 속에서 멈춰 있는 동안엔 아무런 이야기도 생각하지 않았다.
다시 옷을 입고 무대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나를 둘러싼 그림들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나를 그려놓은 그림들이었는데 어쩐지 모두 그들 자신을 조금씩 닮아 있었다.
허리가 긴 사람은 내 허리를 실제보다 더 길게 그려놓았고, 입술이 두꺼운 사람은 내 작은 입술을 실제보다 더 도톰하게 그려놓았다. 코가 높은 사람이 그린 나의 코는 실제보다 오뚝하였고 미간이 좋은 사람이 그린 나의 미간은 실제보다 좁았다.

누구나 남을 자기로밖에 통과시키지 못한다는 점을 두 눈으로 확인했을 때 나는 조금 위안이 되었던가, 아니 조금 슬펐던가.
- 183p


나는 너무 단순한 대답을 하는 동생이 미웠다. 하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돈을 많이 벌면 엄마에게 무엇을 주고 싶은지 생각했다. 가장 주고 싶은 것은 시간이었다. 쉴 시간이 조금 더 생긴다면 엄마는 산책을 자주 하며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더 천천히 늙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엄마가 소피 마르소 사진을 자주 바라보던 때가 못 견디게 그리워졌다. 그때 엄마는 최대한의 자신을 꿈꿀 힘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엄마가 될 수 있었던 어떤 자신, 그 무수한 가능성들이 다 아까워서 서글펐다.
- 212p


저는 옷을 벗어서 돈을 벌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옷을 벗음으로써 짭짤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이유는 그야 물론 남들이 옷을 벗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급 인력이 되려면 남들이 못하는 일 혹은 할 수는 있어도 선뜻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잘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할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기억하며 자란 손녀가 스물두 살이 되어 누드모델이라는 직업을 선택할 줄은, 할아버진 꿈에도 모르셨겠지요. 그는 에곤 실레가 그려놓은 누드화 속 여자들을 제가 얼마나 흠모하며 자랐는지도 모를 것입니다.
- 221 ~ 222p


“다른 일보다 천박할 이유도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더 숭고할 이유도 없죠.”
긴 머리 언니는 담배를 피우러 나갔습니다. 저는 언니를 따라나가서 말했습니다.
“저도 돈 때문에 누드모델이 돼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간 때문에 누드모델이 돼요. 시간을 버는 일이기도 하잖아요.”
언니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상인 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은 빌딩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자동차를 가진 사람도 아닌, 시간을 가진 상인이라고 믿는 우리. 시급 3만 원짜리 모델들. 비참한 마음 없이 벗은 몸을 팔 수 있는 상인들.
- 232p


작가는 시간을 벌기 위해 누드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할 일이 너무 많기에 적은 시급으로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 알바는 시간이 부족하기에.
나는 어땠는가 돌아보았다.
나는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지 못했던 거 같다.
엄마에게 가장 주고 싶은 것이 시간이라고 한다.
작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간을 난 어떻게 썼더라.
방학 때나 주말에는 빈둥거렸던 것 같다.
약속이나 알바가 있을 때가 아니면 하루 종일 씻지도 않고 빈둥거렸다.
시험 때는 벼락치기로 공부를 했다.
내가 그 때 시간의 소중함을 깨달았더라면 난 조금 달라졌을까.

반응형

'독서 끄적끄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날씨와 얼굴 - 이슬아 칼럼집  (0) 2023.07.24
아버지의 해방일지 - 정지아  (0) 2023.07.15
사랑하는데 외로워 - 지현주  (0) 2023.07.14
부지런한 사랑 - 이슬아  (0) 2023.07.13
긴긴밤 - 루리  (0) 2023.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