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 끄적끄적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

by 봄꽃이랑 기쁨이랑 꽁냥꽁냥 2023. 9. 15.

 


사람은 어떻게 진화했을까?
사람도 자기가축화한 종일까?
왜 네안데르탈인이 아닌 우리 종(호모 사피엔스)이 진화했을까?
이 책을 통해 이 질문들에 대해 어느 정도는 답을 찾았다.

나와 다른 집단일 때나, 그 집단의 이해여부에 따라 그 존재를 비인간화.
우리 종의 잔인성을 보여줄 수 있다.
요새 정치를 보면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 다르면 적. 협력은 없다.
전쟁은 또 어떠한가.
현재 다른 지역에서는 전쟁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얼마나 무심한지.
우리와 다른 집단에게는 비인간화하는 경향의 일례다.

집단 간 갈등은 '접촉'으로 개선이 가능하다고 한다.
요즘 시대는 온라인시대로 인해 물리적인 접촉이 많이 사라졌다.
오프라인 없이도 사람간에 친화적이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온라인시대는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매개체이긴 하다.
하지만 온라인은 눈맞춤이 없는 교류라서 집단의 결속이 약한걸까?
아니면 반대로 내 입맛에 맞는 집단을 선택할 수 있어서 더 쉽게 편협해지는 걸까?

집단에서 배제된 소외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어느 집단에도 속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의 범죄가 늘어나는 이유가
내가 속하지 못한 집단에 대한 비인간화하는 경향때문일까?

다정함이 살아남는다.
현재는 집단 간의 갈등이 고조화되어 있다.
집단화의 양상은 더 커져가고, 협력은 없다.
앞으로 우리 종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얼마전 읽은 책, '작별인사-김영하'. 생각이 난다.
인간은 멸종되고,
의식을 갖게 된 기계가 살아남는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휴머노이드.
인간이 휴머니즘을 잃게 되면......

 


 

 

사람은 자제력이 강화되면서 마음이론, 계획수립, 추론, 언어 등의 초강력 인지능력이 발달하게 되고 그에 이어서 우리 종 특유의 행동 현대성과 복합적인 문화 전통이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자연선택이 다정하게 행동하는 개체들에게 우호적으로 작용하여 우리가 유연하게 협력하고 의사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켰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친화력이 높아질수록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이 강화되는 발달 패턴을 보이고 관련 호르몬 수치가 높은 개인들이 세대를 거듭하면서 더욱 성공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사람은 같은 낯선 사람이라도 이왕이면 자신과 같은 집단 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돕고 싶어한다.나와 같은 소속임을 그 낯선 사람도 알고 있다고 생각되면 특히나 더 도우려고 한다.

처음 누군가를 만났을 때 눈맞춤 시간을 길게 끌어 옥시토신이 효과를 발하게 하는 것이, 굳게 악수하는 것보다 십중팔구 탁원한 선택이 될 것이다. 고립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문화적 지식의 맥을 잃는다. 이렇듯 우리 종은 집단 내 타인과 친구가 되는 능력으로 진화 적합도를 상승시킨다.

다른 사람 종처럼 비범한 수준의 자제력까지 간춘 우리는 협력이 가져올 혜택을 신중하게 고려할 줄 알았다. 행동이 가져올 결과까지 고려하여 판단하는 능력은 우리 종의 생존에 큰 이점이 되었다.

 


 

 

우리에게도 타인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새로운 능력과 더불어 일가친척이 아닌 집단구성원을, 심지어는 집단 내 타인까지 강하게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생겨났다. 윌가 더 강렬하게 사랑하게 된 이들이 위협을 받을 때 사람은 더 큰 폭력성을 드러낼 수 있다.

맹목성은 편견보다 훨씬 더 어두운 힘이다.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할 때 그들이 겪는 고통은 우리와 하등 상관없는 일이 된다. 그런 자들은 공격해도 무방해진다. 규칙도, 규범도, 그들은 인간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도덕적 판단도 더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타인에게 친절한 우리 종의 특성은 보노보와 일치하지만, 사람의 경우 이 친절함은 특정 타인에게만 해당된다. 우리는 집단 정체성을 토대로 타인을 판단한다. 자신이 속한 집단을 향한 사랑이 정체성이 다른 타인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공격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우리는 대부분 고통받는 아이를 보게 되면 마음이 아프다. 배우자와 사별한 동료에게는 위로를 전하려 하며, 투병하는 친척에게는 돌봄의 손길을 주고 싶어한다. 우리는 모두 한때 낯선 사람이었던 사람들과 친구가 된 적이 있다. 우리에게는 연민과 공감능력이 있으며, 집단 내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능력은 진화를 통해서 획득한 우리 종 고유의 특성이다.

하지만 이 친절함은 우리가 서로에게 행하는 잔인성과도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본성을 길들이고 협력적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우리 내면에 최악의 속성의 씨앗을 뿌린 것도 동일한 뇌 부위에서 모두 일어나는 일이다.

 


 

 

팀 쿡이 말했듯이, "기술 하나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기술 그 자체가 오히려 문제의 원인인 경우가 있다." 기술은 언제나 그래왔듯이 양날의 검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을 선한 힘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가진 최고의 미덕과 최악의 본성을 함께 예측하고 개발해야 하는데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더 다정하고 친화적인 미래를 위한 해결책에는 새로운 기술이 필요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어두운 본성을 길들일 수 없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야기된 문제에는 사회적 해법이 필요한 것이다.

집단 간 갈등의 경우에는 접촉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행동의 변화가 태도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서로 다른 집단 사람들과 자주 접촉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면 사회적 유대감이 더 많이 형성되며 타인이 지닌 생각에 대한 감수성도 전반적으로 강화될 수 있다.

폭력 시위보다는 평화 시위로 성공했을 때 민주적 체제가 수립되어 다시 내전 상태로 돌아가지 않는 경향이 더 높았다. 평화 시위가 더 성공하는 이 경향은 갈수록 더 확대되고 있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함을. 그것이 우리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숨은 비결이다.

다윈이 말한 '적자'란 당장의 '국소적 환경에 대한 적응 능력'이다. 그러나 신체적 정상적으로 '우월한' 자가 더 잘 생존하며, 심지어 더 잘 생존해야 마땅하는 오해를 낳았다. 자연의 세계에는 우월이 없다. 그렇다면 아예 살아남은 자가 우월하다고 정의해보면 어떨까? 하지만 '살아남는 것이 살아남는다'라는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지금까지의 인류사는 그랬다. 하지만 덕분에 많이 죽기도 했다. 가족과 친구, 부족을 향한 편협한 다정함이, 더 넓은 집단을 향한 보편적 공감으로 확장될 수 있을까?

진화는 목적이 없는 과정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