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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끄적끄적

다정소감 - 김혼비

by 봄꽃이랑 기쁨이랑 꽁냥꽁냥 2023. 8. 25.

 

이런 이유들로 나는 언젠가부터 가식을 응원하게 되었다. 물론 그 가식에 타인에게 나쁜 짓을 하려는 악의적인 의도가 없는 한에서. 가식에는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어보고자 하는 분투가 담겨 있다. '좋은 사람'을 목표로 삼고 좋은 사람인 척 흉내 내며 좋은 사람에 이르고자 하지만 아직은 완전치 못해서 '가식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누군가의 부단한 노력의 과정. 그러니까 내 앞에서 저 사람이 떨고 있는 저 가식은, 아직은 도달하지 못한 저 사람의 미래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 사람이 가진, 저기서 더 앞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누군가가 "넌 가식적이야"라는 말로 섣불리 가로막을까 봐 지레 초조할 때도 있다. 실제로, 특히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이들 중에 "내가 너무 가식적으로 느껴져서 자기혐오가 생긴다"라고 고민 상담을 해오는 경우가 많아서이다.

(...)

혹시 나 자신이 너무 가식적으로 느껴져서 견디기 힘든 날이 있는가? 누군가 나에게 가식적이라고 비난해서 모멸감을 느낀 날이 있는가? 괜찮다. 정말 괜찮다. 아직은 내가 부족해서 눈 밝은 내 자아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내 '가식의 상태'를 들키고 말았지만, 나는 지금 가식의 상태를 통과하며 선한 곳을 향해 잘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보다 최선을 다해 가식을 부리는 사람이 그곳에 닿을 확률이 훨씬 높은 것이다. '척'한다는 것에는 어쩔 수 없이 떳떳하지 못하고 다소 찜찜한 구석도 있지만, 그런 척들이 척척 모여 결국 원하는 대로의 내가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가식은 가장 속된 방식으로 품어보는 선한 꿈인 것 같다.

(...)

영원한 위선은 결국 선으로 남을 테니까. 이 위선과 가식이 헐거워져서 쉽게 벗겨지지 않도록, 위선과 가식으로 아주 똘똘 뭉쳐 살고 싶다.

- 가식에 관하여

 

 


가식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감탄했다.

최근에 나의 가식을 느끼고 혐오한 적이 있었다.

어느날 큰 아이가 친구를 데려왔다.

너무나도 자유분방한 친구(생각해보면 모든 아이들이 다 그랬던 것 같다)여서 감당하기도 힘들고,

너무 지쳤던 터라 친구에게는 웃으면서 말하면서,

내 아이에게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 뭐라고 잔소리를 했다.

그런 내 모습에 내 자신도 혐오를 느꼈는데

내 아이는 그런 엄마를 보며 얼마나 소름이 끼쳤을지...

내 소중한 아이보다 남에게 잘보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싶었다.

 

지금의 나는 가식의 상태를 나에게 들켰지만,

이런 가식의 상태를 통과하여 선한 내가 되어야겠다.

 

영원한 위선은 결국 선으로 남는다.

 

 


 

하지만 때로 이 '기본'이라는 지나치게 확고한 단어는, '기본' 바깥 사람들의 저마다 다른 맥락과 상황을 쉽게 지우기도 한다. A와 나는 성장한 과정도, 몰두하는 대상도 다른데, A의 맞춤법을 보며 나는 '왜 맞춤법을 잘 모를까?"를 따져볼 생각조차 안 했다. 왜? 기본이니까. 기본이라는 것은 이유 불문하고 어느 정도 당연히 갖춰야 하는 거니까. 그래서 '기본'이라고 하는 거니까. 기본 소양이라는 게 때 되면 어딘가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나이를 먹듯 세월 따라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닌데, 그것을 배우고 갖추기 위한 시간과 에너지와 환경이 확보되어야 하는 건데, 그런 확보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기본'으로서 누군가를 판단할 때 배제되기 쉬운 불리한 어떤 입장들에 대해 잊고 있었다. 설사 같은 조건이라고 해도 사람마다 적성과 성향, 강점과 약점은 얼마나 다른가.

(...)

우리 눈에 '기본' 너머의 세계가 보이지 않는다고 세상에 없는 것은 아닌데. 맞춤법 하나로 무시받아서는 안 되는 삶들이 도처에 존재한다. 당신 곁에도 나의 곁에도.

- 그의 SNS를 보았다

 

 


 

'기본'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당연히 크면서 젓가락질을 할 수 있다.

남에게 배려한다.

인사를 잘 한다.

자기 스스로 공부를 한다.

엄마, 아빠가 힘든 것을 안다.

가족의 소중함을 안다.

등등등

 

이 모든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왜? 당연하니까.

그래서 아이들에게 왜 그걸 모르니? 하며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젠 안다.

내가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본'은 배우지 않고도 당연히 아는 것이 아니다.

배워야 알 수 있다.

시간과 노력과 상황이 함께 할 때 '기본'이 '기본'이 되는 것이다.

 

"너는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니?"

이 말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모를 수 있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성가시고 하찮은 존재'로 매일 매일 규정되다 보면, 어느 순간 '누군가에게'라는 글자는 슬며시 사라지고 그저 '성가시고 하찮은 존재'로서의 나만 남는다는 것을. 나에게조차 나는 성가시고 하찮았다. 그렇게 하찮을 수가 없었다.

- 한 시절을 건너게 해준

 

 


 

나의 말 한마디가 남에게 비난이 되지 않게 노력해야겠다.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하는 나의 행동이

나의 아이들에게 상처가 되었겠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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