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 끄적끄적

날씨와 얼굴 - 이슬아 칼럼집

by 봄꽃이랑 기쁨이랑 꽁냥꽁냥 2023. 7. 24.

 

 

자신의 해방과 동물의 해방이 어쩌면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어깨 너머로 비거니즘을 배운다. 비거니즘은 동물을 착취해서 얻는 식품과 제품을 최대한 소비하지 않으려는 운동이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그 방향 쪽으로 움직이며 생활하는 이들을 '비건 지향인'이라고 부른다. 나에게 비거니즘은 어떤 착취에 더 이상 일조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동물과 인간이 관계 맺어온 방식을 개선하고 싶다는 의지다. 이것은 기후위기에 대한 입장이기도 하다. 육식을 줄이는 것만으로는 다가올 기후재난을 해결하기에 충분치 않지만, 현재의 식습관을 티끌만치도 바꾸지 않는 채로 찾는 대안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 16p

 

 


 

공장식 축산은 시민들의 메뉴 선택과 상호작용한다. 이 사슬을 끊는 결정적인 행동이 불매다. 동물의 살과 뼈와 젖에 최대한 돈을 쓰지 않는 것. 이 시도는 결코 미미하지 않다. 우리는 어디에나 있으니까. 나의 꿈은 비인간 동물을 착취하지 않고도 무탈히 흘러가는 인간 동물의 생애이다.

(...)

하지만 그보다 나쁜 건 자신의 선택이 아무한테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믿는 자기기만이다. 전지구인의 총동원이 필요한 이 시대에, 당신은 어떤 것을 그만두고 싶은지 궁금하다. 고기 먹기를 일단 멈춘 동지로서 당신을 기다리겠다. 나에게 없는 지혜가 당신에게 있을 것이다. 우리는 분명 서로에게 배울 수 있을 것이다.

- 19p

 

 


 

1940년대에 태어난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얼굴을 그리워하며 이 글을 쓴다. 아직 만나보지 못했지만 사랑하게 될 미래의 누군가를 생각하며 쓴다. 나는 생의 이야기를 소중히 품고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긴 세월을 간절히 소망하기 때문에 기후위기를 공부한다. 기후에 대한 논의 없이는 미래도 없기 때문이다.

- 24 ~ 25p

 

 


 

조류독감과 구제역 당시 살처분 현장의 사진과 영상 속에서는 여러 대의 포클레인이 커다란 구멍을 판다. 한 명이라도 감염이 확인되었을 경우 그 축사의 모든 동물을 죽이는 경우가 허다하므로 구덩이는 죽음의 규모만큼 거대해진다. 셀 수 없이 많은 소, 돼지, 닭이 구덩이로 밀어넣어진다. 그들 중 누군가는 이미 죽어 있고 누군가는 살아 있다. 고통 없이 죽이기 위한 시간과 비용을 충분히 들이지 않아서다. 살아 있는 동물은 겁에 질려 있고 안간힘을 다해 탈출하려 한다. 본능적인 도망이다. 나 역시 그 본능을 지녔다. 달아다는 동물의 얼굴에서 내가 느끼는 것은 유사성이다. 그들과 나는 다른 점보다 비슷한 점이 훨씬 많다. 그 곳에서라면 우리 중 누구라도 도망을 시도할 것이다. 그러나 살처분은 신속하게 진행되고 대개의 동물은 달아나지 못하며 이런 일은 무참하게 반복된다.

- 28 ~ 29p

 

우리들 중 대다수는 공장식 축산을 발명하지도 않았고 운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일조하고 있기는 하다. 육가공품을 먹을 때마다 축산업은 계속해서 공고해진다. 축산업이 지속되는 한 살처분도 계속될 것이다. 살처분은 육식의 결과이자 과정이다.

- 30p

 

책임감이란 무엇인가. 나로 인해 무언가가 변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내가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을 과소평가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비건 지향 생활을 지속하면서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아끼게 되었다. 세계가 빠른 속도로 나빠지고 있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해볼 수 있는 일들이 아직 많기 때문이다.

(...)

가축 동물들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면 좋을까. 인간에게는 전염되지 않는 것에 안심하거나, 고기 가격 상승을 염려하는 일 말고 또 어떻게 다르게 응답할 수 있을까. 우리의 응답은 현재의 동물뿐 아니라 미래의 동물에게도 꾸준히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축산업과 낙농업에 갇힌 동물을 구체적으로 알아감으로써 시작되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동물인 우리 자신에 대한 공부이기도 하다.

- 32p

 

 

 


 

고기라니, 너무 이상한 말이다.

식재로가 되기 이전과 이후의 이름을 굳이 다르게 부르는 경우가 있던가. 양파는 팔리기 전에도 양파라 불리고 땅속에서도 감자는 감자이며 바닷속에서도 미역은 미역이다. 그러나 돼지나 소나 닭은 식재료가 되고 나면 이름 뒤에 고기라는 말이 붙는다.

[...]

"돼지를 먹는다"보다 "돼지고기를 먹는다"가 더 고급 문장으로 취급되는 이유는 그 말이 당장의 식사가 실제로 살아 있던 동물의 사체를 먹는 야만적 행위와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그들로부터 비롯되는 근원적인 양심의 가책을 지우기 때문이다. "고기를 먹는다"는 문장 속에는 오로지 먹기 위해 동물을 탄생시키고 고통 속에 살게 하다 죽인 뒤 가공하는 과정 모두가 은폐되어 있다. 고기라는 단어 자체가 도축의 현장으로부터 인간의 눈을 가리고 동물의 피 냄새로부터 인간의 코를 막기 위해 존재하는 말이라는 것. 고기에는 동물이 부재한다.

- 40 ~ 41p

 

 


 

인간 동물에게 적용할 수 없는 단어는 비인간 동물에게도 쓰지 않을 것. '암컷 원숭이 한 마리' 대신 '여성 원숭이 한 명'이라고 쓸 것. 한승희의 글에서 윤나리는 이렇게 말한다. "수를 세는 단위인 '명'은 현재 '名(이름 명)' 자를 쓰지만, 종평등한 언어에서는 이를 '命(목숨 명)'으로 치환해 모든 살아 있는 존재를 아우르는 단위로 확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

"물에 사는 동물이지만 죽기 전까지는 '고기'로 불리다가 죽으면 '생선'으로 변모한다. 살아 숨 쉬는 동물을 '고기'로 부르는 종차별을 지양하기 위해 이 책에서는 '물살이'라는 언어를 쓴다." 그의 말처럼 이미 여러 작가들이 '물고기' 대신 '물살이'를 사용하며 문장을 완성하고 있다. 물에 사는 무수한 생명체를 식용 대상으로 한정 짓지 않는 말이다. 또한 공장식 축산과 공장식 수산을 은폐하지 않는 언어다.

- 44 ~ 45p

 

이것은 동물을 한 명씩 세다가 시작된 이야기다. 인간 동물인 내 목숨과 동물인 누군가의 목숨을 나란히 생각할 때 우리가 쓰는 말도 새로워진다. 새로운 언어는 나의 존엄과 당신의 존엄이 함께 담길 그릇이 될 것이다.

- 46p

 

 


인터넷에는 귀엽고 웃긴 동물 영상과 이미지가 범람한다. 동물을 이렇게까지 귀여워하는 시대는 없었다. 한편 동물을 이렇게까지 많이 먹는 시대 또한 없었다.

- 49p

 

 


 

 

우리는 공장식 축산과 수산의 소비자이거나 거대한 동물산업의 관계자이거나 최소한 구경꾼이다.

- 53p

 

동물 신체의 이상 징후는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이미 알려진 대로 전염병의 60퍼센트, 새로운 전염병의 75퍼센트가 동물로부터 유래했다는 연구 결과에 주목한다면 팬데믹 시대에 유심히 돌아보아야 할 대상은 바로 동물인 듯하다. 지금껏 해왔던 방식으로 동물과 관계 맺는다면 코로나보다 더 치명적인 질병들이 계속해서 발생할 테니까.

- 54p

 


 

얼마전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다.

옛날 인간이 동물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던 때.

유럽의 노예들의 동물보다 못한 삶.

왕이 배타고 이동을 할 때 배에 노예들을 싣고 가는데

거의 지금 닭장 수준의 공간에 노예들을 넣고

몇 개월을 이동했다는 것.

식량 부족의 위기가 오면

가장 먼저 노예부터 바다에 수장시켰다는 것.

이 내용을 보고 너무 잔인하고 소름끼쳤다.

동물 윤리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우리가 지금 동물들에게 얼마나 잔인한 지에 대해서.

인간 동물과 비인간 동물에 대한 생각이 달라야 할 이유가 있을까.

우리 인간 동물이 이 지구를, 우주를 주인 의식으로 생각해서이지 않을까.

 

비건.

고기를 끊는 것보다 비건음식을 골고루 먹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 앞서 걱정을 한다.

아이의 영양에 대해서도 걱정이 된다.

시작도 전에 걱정이 한가득이다.

 

완벽한 비건을 작정하고 시작하기보다,

고기를 줄이는 노력부터 해보고자 한다.

까다롭게는 아니지만,

동물의 윤리를 생각하며,

비건을 지향하고자 노력해보려 한다.

노력하다보면, 어느 순간 비건의 영역에 가닿아 있지 않을까.

 

 


 

존중은 '마음의 눈' 같은 말로는 구현되지 않는다. 성심성의껏 대체 텍스트를 마련하는 게 비장애인의 할 일이다. 우리에게 남은 일은 죽을 때까지 다른 언어를 배우고 헤아리는 것이다. 언어란 모두에게 영원한 슬픔이자 기쁜이므로. 맹인을 위한 이야기는 더 충분해져야 한다. 눈 밝은 나의 동료 성은 씨와 닮은 독자가 여기저기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은 채로 책을 만들겠다.

- 94p

 

 


 

어떤 기본권은 머리카락과 무릎을 바쳐도 쉬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들이 목숨 걸고 단식하며 외친 구호는 당연하고 소박한 요청들이다. 당연한데 법이 아직 수호하지 않는 권리에 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들은 더욱더 큰 소문으로 널리 퍼져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차별과 노동으로부터 무관한 존재는 아무도 없으니까. 우리 중 누구는 어떤 법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살거나 죽는다. 농성장에, 삭발 현장에 가보지 않고도 어렴풋이 알 수 있다. 미류와 이종걸과 장혜영과 박경석이 나와 내 이웃들 앞에서 싸워주고 있음을. 이 국가가 과거에 잃은 소중한 사람들과 앞으로 올 사람들을 대신해 싸워주고 있음을. 우리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걸 믿지 않고는 그렇게 싸울 수 없을 것이다.

- 120 ~ 121p

 

 


 

기후와 인간과 동물은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탈석탄과 탈축산을 동시에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중요하다. 이들은 화석연료 중심의 구조로부터, 유한한 지구에서 무한히 성장할 수 있다는 신화로부터, 만물을 인간중심적으로 변형하고 착취해온 과거로부터 전환하려 한다. 전환을 위한 기후 정치에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기후 정치인과 기후 유권자 그리고 기후 의제다. 구체적인 기후 의제를 규정하고 해결책을 도출하는 정치는 지금껏 충분하지 않았다. 비거니즘의 정치 의제화는 이제 겨우 출발선 위에 서 있다. 이 문제를 소중히 여기는 기후 정치인과 유권자가 늘수록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결국 국회로 어떤 사람을 보낼 것인지가 관건이다.

- 126p

 

 


 

은유 작가의 [다가오는 말들] 중 한 문단을 언급하기도 했다.

 

한 아이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든 신체적 온전함과 존엄성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후원금을 척척 내는 어른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부모님 뭐 하시느냐' 다짜고짜 묻지 않는 어른이 많아져야 하고 이력서에 가족관계를 쓰지 않도록 하는 제도가 생겨야 한다. 이 세상에 '불쌍한 아이'는 없다. 부모 없이 자란 자식이라는 굴레를 씌우고 불쌍한 아이를 만들어내는 집요한 어른들이 있고, 정상가족이라는 틀로 자율적 존재를 가두거나 배제하는 닫힌 사회가 있을 뿐이다.

(...)

연대란 고통을 겪은 어떤 이가 더 이상 누구도 그 고통을 겪지 않도록 움직이는 것이다. '부디 너는 나보다 덜 힘들었으면 좋겠어. 그러니 내가 알게 된 것들을 최대한 다 알려줄게'라고 말하는 것이다. 당사자가 아닌 이들이 할 수 있는 연대도 있다.

부모가 기본값인 질문을 건네지 않는 것, 고아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않는 것, 보호대상 아동에 대한 이미지를 고정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것 또한 그중 하나일 것이다.

- 130 ~ 131p

 

불쌍한 아이.

측은지심.

어렵다.

'불쌍한 아이'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측은지심이 든다.

마음의 방향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 모를 때가 있다.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아이를 대하는 것이

'불쌍한 아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게 되는 것인지.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측은지심의 마음은 자기 우월감인지.

내 마음을 대하는 것이 조심스러울 때가 있다.

 

 


 

철새들이 제 계절에 하늘을 무사히 가로지르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고 누군가는 무심히 말할 테다. 한편 사람드이 땅을 두고 밥그릇 싸움을 하는 동안 어떤 종은 멸종에 가까워져간다는 게 관찮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늘과 땅과 물에 난 길들이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금 힘주어 적어본다.

- 160p

 

 


 

비건 지향 생활 역시 완벽할 수 없고 나는 앞으로도 크고 작은 부끄러운 짓을 반복하겠지만, 고통의 총량을 줄이기 위한 노력은 관두지 않고 싶다. 내가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의 앞뒤에 어떤 존재가 있는지 상상하기를 멈추지 않으려 한다.

- 166 ~ 167p

 

 


 

더 이상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선언이 급진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언제나 이상하게 느껴진다. 비건은 이미 결정했기 때문에 되는 게 아니라, 아직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되는 게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비거니즘은 식물 먹기가 아니고 동물 먹지 않기이다. 그들은 무언갈 하는 게 아니고, 도리어 하지 않는다. 비건은 결정을 보류하고 판단을 중지한다. 그들은 내일 뭘 먹어야 할지 확신하는 사람들이기보다는, 어제 먹은 것을 되새김질하고 오늘 먹을 것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우유부단한 사람들에 가깝다. 아마도 내내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친구의 표정이, 친구인 개의 표정이, 친구인 개의 친구의 표정이, 그의 마음속에서 모래알처럼 자분자분 씹히기 때문에.

- 183p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