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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끄적끄적

나의 누수 일지 - 김신회

by 봄꽃이랑 기쁨이랑 꽁냥꽁냥 2023. 9. 23.

 
 
좋아하는 작가의 유투브를 보다가
초대 작가로 출연하여 알게 되었다.
에세이 출간한 책만 10권이 넘는다는 말에
궁금증으로 처음 읽었던 책이
"심심과 열심"
그 책을 읽을 때도 작가님의 소신있는 발언적인 문체에 반해었다.
올해 신간으로 나온 이 책.
안 읽을 수가 없다.

역시 내가 반한 문체는 살아있었다.
문장을 보고 배꼽이 빠져라 웃을 수가 있다니.
너무 너무 좋다!!

제목을 봤을 때 어떤 '누수'일까 했는데
정말 집의 '누수'였다.
의외의 소재에서 재밌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사건을 책으로 엮다니!

'누수'를 겪으면서 윗 집과 분쟁을 다룬 내용이
한 편의 소설을 읽은 듯 하다.
작가가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큰 사건을 겪으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한 편의 큰 사건의 소설을 읽고 덮으면서
나에 대해서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지금 어떤 ‘누수’를 겪고 있을까?
나는 어떤 '누수'를 겪고 있을까?
 

누군가를 만나 대화하고, 관심이 생기고, 친분과 우정을 쌓아가는 일에 나이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그가 해온 경험과 생각이 그 사람 안에 켜켜이 쌓여 이른바 '어른스러움'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얼굴에 묻어나는 연륜으로 나이를 가늠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보다 지혜로울 거라 기대했던 어른의 미성숙한 행동에 한숨이 흘러나오고, 내 딸뻘인 사람이 나보다 더 큰사람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도, 나이는 저절로 먹는 게 아니라는 말도 다 맞는 말 같다. 나이는 그저 숫자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니까.
(...)
평소에는 상관없지만, 예상 밖의 문제들이 발생할 때마다 '미숙한 나'가 나를 괴롭힌다. 이것도 모르고 저것도 모르고, 이것도 무섭고 저것도 두렵고. 당당히 1인분으로 살고 있다고 착각해온 시간이 나를 조롱한다. 너 이런 거 하나도 모르잖아. 이때까지 이런 것도 한 번 안 해보고 뭐 했어, 하면서.
몰라도 되는 삶은 안락하다. 계획을 실천하며 살 수 있는 일상은 순조롭다. 그런 인생을 잘 굴러가게 한다고 해서 과연 어른일까. 지금껏 알던 세상이 무너졌을 때 잿더미를 털고 일어나, 몰랐던 걸 하나하나 깨치며 단단해지는 게 어른 아닐까.
몇 년 전부터 SNS에서 자주 보이는 말이 있다. '나도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조금 어른이 된다고 믿는다. 알고 싶지 않았던 걸 알게 될 때, 이제껏 모르고 살았던 걸 해야만 하는 시간들이 쌓여 연륜이 된다. 어쩌면 이번에야 비로소 나는 어른이 되는 중인지도 모른다.
- 나이 먹는다고 어른 되지 않는다



크면 자동적으로 어른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나이가 되어도 모르는 것 투성이에, 허둥대는 날 보면,
엄마가 떠오른다.
엄마는 나보다 더 젊었던 나이였을 텐데
날 어떻게 키웠을까.
몰랐던 걸 하나하나 깨치며 단단해지는 게 어른이라면,
그 어른되는 거 조금 늦게 하고 싶은 마음은
내가 아직 어리다는 걸까.
굳이 몰라도 되는 걸 모르고 살고 싶은 마음은
내가 너무 이기적인걸까.
 


 
소싯적(!)에는 '특별한 날은 특별하게!'라며 없는 이벤트도 만들어 왁자지껄 놀았다. 그래봤자 일상이 축제가 될 리 없는데 어떻게든 신나는 기분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이제는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가 더 끌린다. 매일 먹는 아침을 먹고, 책을 읽고, 개와 산책하러 가고, 어제 하던 일을 이어서 하다 문득 오늘의 의미를 느낀다.
- 고요한 생일



취향이 어느 정도 굳어진 나이에 취향과 동떨어진 곳에서 살아야 하는 건 고역이었다. 그렇지만 어디 현실이 나의 취향 따위를 배려하는가. 현실이 시궁창이면, 취향은 거기다 꾸역꾸역 달아놓은 레이스 커튼 같은 것이다.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것. 그렇지만 떼어버리기엔 아쉬운 것. 끝내 내려놓지 못한 고집 때문에 점점 더 구차해지는 것.
(...)
나는 집이 생겼다는 사실을 즐기기보다 집이 생겼다는 변화에 허둥댔다. 돈을 대하는 나의 태도와 집을 대하는 태도는 결국 같았다. 나는 낯선 걸 두려워하는 사람. 새로운 걸 즐기지 못하는 사람. 걱정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하는 사람. 불안이 큰 사람은 현재를 살지 못한다. 과거에 얽매이거나 미래를 두려워하느라 지금을 놓친다. 새로이 갖게 된 돈과 집은 내가 가진 불안을 더 크게 불려놓았다. 매일 집구석에 틀어박힌 채, 이 집이 나의 불안과 나를 동시에 집어삼키는 상상을 했다.
- 돌아가고 싶은 집


 
시대가 발전할수록 정보량은 방대해지고, 그 안에서 '올바른' 정보를 '제대로' 선택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개인의 몫이 된다. 정보가 이렇게나 많은데도 선택을 '그렇게밖에 못 한' 사람의 능력 탓이 되는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매 끼니 음식 메뉴 하나 결정하지 못하는 결정 느림보들이 이해되지 않았는데 어느새 그들에게 공감하게 된다. 요즘은 선택지가 많아도 너무 많다.
(...)
다양한 선택지는 선택의 즐거움을 부여할 것 같지만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결국에는 불만족스러운 결정으로 이끈다.
(...)
그래서인지 나는 선택지가 많아 혼란스러울 때면 익숙한 것을 고른다.
(...)
그렇다면 그 많은 선택지와 정보가 굳이 필요할까. 현명한 선택을 위해 필요한 건 다양함이 아닌 '나는 내가 안다'는 뚝심 혹은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는 유연함일지도 모른다.
- 정보화 시대의 폐해



버거운 문제를 맞닥뜨릴 때마다 '결국은 내가 헤쳐나가야 할 일'이라는 실감에 몸이 휘청인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더라도 다 나의 일. 내가 중심이 되어 해결하고 견뎌야 한다는 막막함은 분명 '자유'와는 다른 감각이다. 사고 친 건 내가 아닌데도 내가 해결해야 하고, 피해를 본 건 나인데 피해를 증명할 사람도 나라는 깨달음은 불쑥 삶을 외롭고 어렵게 만든다. 이럴 때마다 엄마 아빠 생각이 난다.
(...)
늘 고단한 부모님의 인생은 당신들이 선택한 결과라 믿으면서. 애초에 더 나은 걸 골랐다면 그렇게 힘들진 않았을 텐데, 라면서. 결국 인생은 선택의 문제라고 여겼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우리가 선택한 인생 같지만 우리는 선택한 기억이 없다. 어찌어찌 살다 보니 여기 이렇게 당도했을 뿐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다른 사람 눈에는 '왜 저렇게 밖에 못 살아?' 싶은 사람일지라도 그는 있는 힘껏 살고 있는 것이다.
(...)
살면서 어려움을 대할 때마다 내 나이 때의 부모님이 떠오른다. 당신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세월에 대한 반성이라도 된다는 듯이. 나는 죽었다 깨나도 엄마 아빠처럼은 못 살 것 같다. 그 감정의 절반은 패배감이고 절반은 안도감이다. 나는 혼자라는 실감 역시 그렇다. 절반은 패배감이지만 절반은 안도감이다.
- 인생을 선택할 수 있는가



누군가를 만나 대화하고, 관심이 생기고, 친분과 우정을 쌓아가는 일에 나이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그가 해온 경험과 생각이 그 사람 안에 켜켜이 쌓여 이른바 '어른스러움'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얼굴에 묻어나는 연륜으로 나이를 가늠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보다 지혜로울 거라 기대했던 어른의 미성숙한 행동에 한숨이 흘러나오고, 내 딸뻘인 사람이 나보다 더 큰사람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도, 나이는 저절로 먹는 게 아니라는 말도 다 맞는 말 같다. 나이는 그저 숫자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니까.
(...)
평소에는 상관없지만, 예상 밖의 문제들이 발생할 때마다 '미숙한 나'가 나를 괴롭힌다. 이것도 모르고 저것도 모르고, 이것도 무섭고 저것도 두렵고. 당당히 1인분으로 살고 있다고 착각해온 시간이 나를 조롱한다. 너 이런 거 하나도 모르잖아. 이때까지 이런 것도 한 번 안 해보고 뭐 했어, 하면서.
몰라도 되는 삶은 안락하다. 계획을 실천하며 살 수 있는 일상은 순조롭다. 그런 인생을 잘 굴러가게 한다고 해서 과연 어른일까. 지금껏 알던 세상이 무너졌을 때 잿더미를 털고 일어나, 몰랐던 걸 하나하나 깨치며 단단해지는 게 어른 아닐까.
몇 년 전부터 SNS에서 자주 보이는 말이 있다. '나도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조금 어른이 된다고 믿는다. 알고 싶지 않았던 걸 알게 될 때, 이제껏 모르고 살았던 걸 해야만 하는 시간들이 쌓여 연륜이 된다. 어쩌면 이번에야 비로소 나는 어른이 되는 중인지도 모른다.
- 나이 먹는다고 어른 되지 않는다



세 번째는 화를 내는 건 잘못된 행동이라는 믿음이다. 앞서 말했듯 감정에는 좋고 나쁨이 없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소위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감정, 즉 외로음, 슬픔, 짜증, 분노 등을 느낄 때 '이런 감정은 나쁜 것이고 이걸 느끼는 나는 잘못된 사람'이라고 여긴다.
감정이 행동으로 이어져 실제로 누군가를 해할 때 문제가 될 뿐,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평소 자기 검열이 심하고,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런 감정을 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죄책감을 느낀다. 자신의 행동에 이어 감정까지 제어하며 스스로 완벽히 통제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 진짜 감정



맨 처음 나를 사로잡았던 분노는 어느새 억울함으로 바뀌었다. 억울하다는 감정은 사람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만든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나 좀 알아달라!'며 투덜대게 한다.
(...)
하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바꾸려 할 때 삶은 어긋난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은 일상의 아주 작은 일부터 통제해보는 것이다. 아침 챙겨 먹기, 하루에 3000보 걷기, 밥 먹고 나서 바로 설거지하기 등등. 사소한 실천 목록을 만들어 하나씩 달성하면서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을 늘려가는 것이다.
(...)
얼마 전 SNS에서 본 글귀가 떠오른다.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남을 통제하려 한다.' 나는 타인의 감정,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 심지어 나의 감정도 통제할 수 없다. 삶에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얼마 없다.
(...)
"시간이 지나니까 뭐가 제일 열받는 줄 알아? 그 사람을 증오하느라 소모한 감정과 시간이 너무 아까운 거야. 왜 그랬어야 했나 싶더라. 내가 들은 시간과 감정은 어떻게 해도 돌려받을 수 없잖아."
-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TV 프로그램 <알쓸인잡>(TvN)에서 소설가 김영하는 말했다. "개인적으로 경계하는 것 중 하나는 정의감이 들 때예요. 이 정의감이 어디서 왔을까 알아봐야 해요." 그는 인터넷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거나 글을 올리는 등, 간단하게 정의감을 실현하고 잊어버릴 수 있는 요즘 같은 시대야말로 정의에 관해 더욱 신중해질 때라고 지적했다. 어쩌면 나와 의견이 맞는 사람에게만 공감 능력을 발휘하면서 그걸 옳음 혹은 정의라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의 말은 정확히 나를 향했다.
(...)
이웃에게 모질게 구는 동안 누구보다 내가 고통스러웠다. 싸늘한 말을 내뱉은 날이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점점 팍팍해지는 나를 대면하면서, 정작 내가 상처 입었다. 나는 이런 사람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이런 사람 싫은데. 아무리 그래 봤자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 정의란 무엇인가



지킬 게 있는 사람은 강해지는 것 같지만 오히려 연약해진다. 그리고 각박해진다. 행여나 더 큰 불이익을 볼까 봐 날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그게 과연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마음의 여유는 세상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온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해결될 거라는 믿음, 내가 타인을 믿는 만큼 타인도 나를 믿어줄 거라는 믿음, 행여나 실패하고 넘어지더라도 붙잡아줄 수 있는 안전망이 존재한다는 기대. 우리 사회에서는 이것이 희박하다.
(...)
과연 이게 개인의 인성 또는 성향 때문일까. 사회는 나 같은 개인에게 관심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것을 지키느라 어제보다 오늘 더 표독스러워진다. 나와 이웃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같은 사람들이 모인 사회가 나날이 각박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과연 행복한가.
-지킬 게 있는 사람



그동안 상황을 신속히 해결하는 일에 급급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잊었다. 나는 싸움을 무서워하는 사람. 예상외의 상황에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변하는 사람. 뭐 하나에 꽂히면 주변을 돌아볼 줄 모르는, 이른바 '유도리' 없는 사람. 그러면서도 괴로운 내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해 쩔쩔매는 사람. 그런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과연 '옳음'일까 '적당함'일까.
(...)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중해야 할 것은 그럴듯해 보이는 해결책을 찾는 일이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바로 보는 것이다.
- 터닝 포인트



대학교 때, 교수님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저는 이 세상에 대화로 풀 수 없는 문제는 없다고 생각해요. 여러분도 사정이 생기면 뭐든 이야기하세요. 제가 들을게요." 당시에는 그저 마음 넓은 어른이라서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세상의 이치였던 걸까. 대화로 풀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감정이 앞서면 시도 자체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떤 일을 대화로 풀고 나면 생각보다 그게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이라는 걸 알게 된다.
- 결단의 시간



내가 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이유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짜가 더 진짜 같은 것처럼, 애써 좋은 사람인 척하며 살아왔을 뿐이다. 앞으로도 나는 온갖 모순과 위선을 정리 안 되는 짐처럼 끌어안고 살아갈 것이다.
(...)
故物或損之而益(고물혹손지이익)
或益之而損(혹익지이손)
대체로 사물은 손해를 보는 것이
오히려 이익이 되고
이익을 보는 것이 도리어
손해가 되는 경우가 있다.
- 재미로 쓰고 제미로 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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