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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이라는 환상 - [해방의 밤 - 은유] 책 중에서

by 봄꽃이랑 기쁨이랑 꽁냥꽁냥 2024. 4. 6.

 

 

능력주의란 단어가 생소할지 몰라도 알고 보면 우리에겐 공기 같은 관념입니다. 더 많이 노력한 사람에게 더 많이 보상하는 원칙을 따르는 자본주의 사회의 분배 규범이죠. 가령 임용고시를 통과한 교사는 기간제 교사보다 높은 임금과 안정된 지위를 보장받죠. 반면에 기간제 교사는 학교에서 똑같이 수업을 하고도 낮은 임금을 받고 불안정한 고용 환경에 놓입니다.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건, 그것이 시험을 통과한 개인의 노력에 따른 정당한 대가라고 보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러한 능력주의가 과연 공정한가? 우리 사회의 신앙과도 같은 믿음 체계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선 능력은 개인의 것인가? 저는 교육열이 높은 지역에서 20년을 살았어요. 그 동네 아이들은 이유식부터 유기능 재료로 만들어진 균형 잡힌 영양식을 먹어요. 잘 꾸며진 자기 방엔 성장기에 맞는 자극을 주는 책과 교재가 상비되어 있죠. 책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훈련이 된 채 초등학생이 됩니다. 평일엔 질 높은 사교육을 병행하고 주말이면 박물관으로 견학을 가고 방학이면 해외로 연수를 다녀와서 어학 실력을 키우는 등 체계적인 일상 관리가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학창 시절을 보낸 후 소위 '명문대'에 진학하는 것을 목도했습니다.
현수는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여섯 식구가 함께 삽니다. 엄마는 장애가 있고 현수의 교육에 대해 학교와 의사소통이 불가능해요. 현수처럼 적절한 정보와 돌봄을 제공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배움이 느린 학생'으로 자라는 아이들이 사회 곳곳에 있습니다. 이렇게 다른 계급 다른 조건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같은 시험지로 같은 날 시험을 치른다고 해서, 그걸 공정한 경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한 사람의 '능력'이란 것은 타고난 재능이나 자질보다 거족으로부터 우수한 학업 기회가 꾸준하게 제공되느냐, 행운이 따르느냐 등 비능력적 요인에 의해 많은 것이 좌우됩니다. 그런 점에서 "'부모를 잘 만나지 못한 능력'이 현수의 능력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말해도 무리가 없게 됩니다. "능력은 환경적·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온전한 개인에게 속한 능력'이란 환상이다."
또 하나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왜 능력을 꼭 학력과 성적으로만 측정하는가? 즉, 능력을 도대체 누가 평가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이와 관련해 떠오르는 일화가 있어요. 한번은 제 책을 읽은 고등학생이 이런 후기를 남겼어요. "글쓰기를 배우지 않아도 글을 잘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은유 작가님은 글쓰기를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는데도 엄청난 흡인력을 가지며 독자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해보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과분한 칭찬이지만 사실 오류가 있어요. 저는 글쓰기를 배웠거든요. 다만 대학을 다니지 않았고 등단 같은 평가 시스템을 거치지 않아서 '전문적' 배움이 아닌 것으로 학생은 판단한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동서고금의 훌륭한 작가들의 책을 보면서 입학이 없어서 졸업도 없는 공부를 지속적으로 해왔습니다. 저 학생의 후가기 보여주듯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능력주의에 기반해 사고합니다. 그리고 능력주의를 작동시키는 강력한 기제는 바로 시험이고요.

시험은 실력 측정의 도구를 넘어서 모두가 결과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순응의 장치가 되었고, 그래서 평가를 거치지 않은 능력으 무능력으로 보이게 합니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이 현장에서 쌓은 경험과 실력은, 단지 시험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의심을 받잖아요. 노동자로서 기본적인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는 구실이 됩니다. 일하다가 죽는 사람도 비정규직 비율이 높거든요. 말하는 동안에도 계속 속상하네요. 공정함의 대명사 같은 능력주의가 실상은 차별과 불평등의 근거가 되는 부조리한 현실이 너무 완고하게 느껴졌습니다.

"시험은 능력을 제대로 검증해주는 것이 아니고, 게다가 한번의 시험이 지속적인 차별을 정당화할 근거가 되지도 못한다." 우리가 의심 없이 행했던 일을 의심하는 순간 이미 해방의 바람은 불어오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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